미술/서양미술

[미술사]근대 미술 -지역별 르네상스 회화 정리

츄츄네 2023. 9. 13. 23:27
반응형

지역별 르네상스

※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이유


① 로마의 유적과 전통이 가장 많이 남아 있었고 프랑스 양식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았다.

② 11세기부터 여러 도시 국가(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볼로냐, 제노바등)를 형성, 동방과 지중해 무역을 교류하면서 풍부한 경제력을 갖게 되었다.

③ 지리적으로 지식과 문화의 교류에 좋은 조건이어서 일찍이 비잔틴 제국과 교류, 아라비아로부터 자연 과학과 철학 등을 접할 수 있었다.

④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들이 많았다.

⑤ 새로 형성된 부유한 시민계급 사이에 현실주의와 개인주의 의식이 나타났다.

 

1. 이탈리아  르네상스

(1)15세기 피렌체

보티챌리<비너스의 탄생>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피렌체는 오랫동안 문학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고전 취향적이면서 밝고 생기 넘치는 피렌체 미술은 15세기에 시에나, 움브리아, 베네치아 등 이탈리아 각지로 퍼져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방과 북부의 페라라, 로마 등지에서 많은 작가들을 배출했다. 이 새로운 스타일을 탄생시킨 콰트로첸토시기 (15세기) 미술계의 삼두마차는 미술에서 자연주의를 다시 도입한 화가 마사초, 조각가 도나텔로,  우아한 선을 통해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준 화가 보티첼리가 있다.

(2)15세기 플랑드르

반 에이크 <니콜라 롤랭 수상과 성모>

  플랑드르 지방의 도시들은 13~14세기에 상공업의 중심지로 급속히 번영하였다. 이곳은 고대 문화에 대한 영향으로부터 소외되어 왔기 때문에 자연주의적인 화풍이 자연스럽게 발생할 수 있었다. 더욱이 유화 기법의 발명은 당시 템페라나 프레스코 기법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미묘한 음영의 차이를 해결할 수 있었고, 색을 겹쳐 칠할 수 있어 사물을 천천히 객관적으로 묘사할 수도 있게 되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던 작가는 판 에이크(Van Eyck, Jan 1395~1441)였다. 

 


(3)전성기(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16세기에는 미술의 주도권이 피렌체에서 로마와 베네치아로 옮겨 갔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 같은 거장들이 회화와 조각에서 유래 없는 걸작들을 생산했고, 그들의 작품은 엄격한 구도와 완벽한 비례, 원근법 등 르네상스의 기법을 충망라하여 회화 발전의 정점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1500~20)를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라 부른다.

(4)16세기 베네치아

조반니 벨리니 <성 프란치스코의 환희>

  피렌체와 로마에서 활약했던 화가들이 조각적인 형태와 서사적인 주제를 주요하게 추구한 반면, 베네치아 유파(The venetian school)의 화가들은 색채와 질감, 분위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ini, 1430~1516)는 새로운 유화 기법에 정통했던 첫 이탈리아 화가였다. 티치아노의 스승이었던 벨리니는 또한 풍경과 인물을 융합시킨 최초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한편, 조르조네(Giorgione,1476-1510)는 빛과 색채를 이용하여 분위기를 상승 시켰던 화가였다. 그의 작품 <템페스트>를 보면 성난 폭풍우의 어둡고 신비스러운 분위기가 잘 묘사되어 있다. 베네치아 출신의 화가 중에 가장 명성을 날렸 던 티치아노 이후, 틴토레토(Tintoretfo)와 베로네제, (Veronese)가 이 전통을 물려 받아 짙은 색채와 극적인 구성으로 거대한 스케일과 웅장한 스타일을 계승하였다. 18세기에 로코코 화가 , 티에폴로(Tiepolo)가 베네치아 유파의 전통을 물려 받았으며, 구아르디 (Guardi)와 카날레토(Canaletto)의 운치 있는 도시 풍경화 속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2. 북유럽 르네상스 

(1)16세기 플랑드르

브뤼겔 <눈 속의 사냥꾼>

  피렌체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혹은 플랑드르 지방)에서도 1420년경부터 예술의 새로운 진보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유럽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적인 의미의 부활과는 거리가 멀다. 네덜란드(당시 네덜란드는 플랑드르 지방으로 불리며, 지금의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합친 것이다)는 당시 재발견될 고대의 유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대로 고딕 양식을 타파하고 새로운 예술의 개혁을 이루어 냈다. 북유럽인들은 자연에 눈을 돌렸다. 그들에게는 이상적인 비례를 가르쳐 줄 고전 조각품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적인 기법으로 세부 묘사에 치중하며 사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널리 퍼졌다. 이와 같이 공들인 묘사법은 초상화에서 특히 두드러졌는데, 프랑스의 왕 샤를 6세는 신부감을 물색할 때 화가를 보내어 초상화를 그러 오게 한 뒤 그림만 보고 결정할 정도였다. 이와 같은 정밀 묘사는 북유럽 르네상스 화가들이 터득한 유화 기법에 의해 가능했다. 유화는 템페라보다 마르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색채를 혼합할 수가 있었으며, 따라서 명암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입체적으로 보이는 효과를 낼 수 있었다. 그들은 또한 '대기 원근법' (atmospheric perspective ; 관람자로부터 멀리 있는 사물일수록 점차 흐릿하게 그려 나가는 방법)을 통해 공간감과 거리감을 전달하였다.

 


(2)독일 르네상스

홀바인 <헨리 8세>

  네덜란드 화가들의 독창성에 한걸음 뒤처져 있었던 독일의 화가들은 16세기 초반부터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의 업적에 비견 할만한 회화적 발전을 이루어 내면서, 북유럽 유파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예술의 최전성기와 거의 동시에 독일도 전성기 르네상스를 구가했는데 그뤼네발트(Grunewald) 의 경건한 종교화, 뒤러(Durer)의 기술적으로 완벽한 판화, 홀바인(Holbein)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확한 초상화가 그러하다.

 

 

(3)매너리즘과 후기 르네상스

틴토레토 <최후의 만찬>

  라파엘로가 죽은 1520년부터 1600년까지 전성기 르네상스 말기와 바로크 초기의 중간 시기를 마니에리즘 혹은 후기 르네상스 시기라 부르며, 미술은 이제 막바지를 향해 치닫게 된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는 '성인' 으로 불리웠다. 현실을 묘사하는 데 문제가 되었던 난점들은 모두 해결되었으며, 예술은 완벽함과 조화를 달성하였다. 그 이후의 미술가들은 조화와 이성, 현실성을 대신해서 부조화와 감성, 상상력 을 발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창적인 작품을 만들려는 욕망에 후기 르네상스 화가들 이른바 마니에리스트들은 자연의 관찰에 기초한 사실주의 양식을 저버렸다. 또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과장하여 지나치게 귀족적인 우아함을 추구한 결과 균형적인 안정감 대신 불안정함을 드러내고 있다.
  시대도 매우 불안정하고 무질서했다. 독일과 스페인이 로마를 침략했고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황의 권위도 실추되었다. 전성기 르네상스와 같이 안정된 시대에는 그림의 구성도 좌우대칭적이며 중심이 가운데를 향했으나 후기 르네상스 시기에는 구성도 사선을 위주로 하여 가운데가 텅 빈 채 사람들이 그림의 구석으로 몰려있다. 이것은 공통된 믿음을 잃어버린 채 혼란에 빠진 당시 현실이 회화 속에서 불균형과 산만함으로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
'마니에리즘 이란 용이는 이탈리아어 디 마니에라(Di Maniera)에서 나온 것인데 그 의미는 미술 작품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 보다는 일정한 규범의 양식으로 그려야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마니에리스트들의 그림은 양식이 서로 동일하기 때문에 비슷비슷해 보인다.
  인물들의 코트라포스토 동작이 지나쳐서 몸 전체가 한것 비틀러 있다. 육체 묘사도 왜곡되어 길게 늘어져 있거나 지나치게 근육질로 그려져 있다. 색채는 원색적이고 긴장감과 운동감의 느낌을 강조하고 있으며 빛의 묘사도 매우 비현실적이다.
  마니에리즘 작가로서 명성을 날린 이는 폰토르모(Pontormo)와 로소(ROsso)가 있으며, 브론지노(Bronzino)는 긴 목과 늘어진 어깨를 가 진 우아하고 섬세한 취향의 초상화로 유명하다. <긴 목의 마돈나)를 그린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역시 유사한 육체의 왜곡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인 첼리니(Cellini)는 그의 유쾌한 자서전 으로 유명하다.

 

 

(4)스페인 르네상스

엘 그레코<요한 묵시록의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스페인에서 가장 활약이 두드러진 화가는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였다. 당시 엘 그레코는 화가로서의 첫 수업을 평면적이고 도안적인 비잔틴 양식을 배우는 것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베네치아에 온 그는 곧 티치아노의 생생한 색채와 틴토레토의 극적인 빛의 사용법, 그리고 로마의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와 마니에리즘의 영향을 받았다. 그의 본명 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kos Theotocopoulos)였으나,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그리스인이라는 의미의 '엘 그레코' 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엘 그레코를 마니에리즘 작가로 분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그의 그림이 마니에리즘으로 분류하기에는 너무 개성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근원을 알 수 없는 비현실적인 빛의 사용이나 강렬한 분홍색, 녹색, 밝은 노랑과 파랑 같은 원색의 사용 등에서 마니에리즘적인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인체는 왜곡 되어 길게 늘어져 있고 인물들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며 종교화 속에서 가시적인 세계를 정확히 묘사하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고 천국의 환상을 묘사하는데 전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