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미술
1. 개관
바로크란 용어는 허세부리고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종종사용되지만, 17세기는 렘브란트 (Rembrandt)나 벨라스케즈 (Velizquez)와 같은 예술적인 천재를 배출했을 뿐만 아니라 미술의 영역을 일상 생활로까지 확장시킨 시기이다.
바로크 시대의 미술가들은 로마 유학을 통해 고전 유물과 전성기 르네상스의 걸작을 공부한 후 자국으로 돌아가 자신이 배운 것을 자국의 특수한 문화적 환경과 융화시켜 새로운 작업을 시작해갔다. 그 양식은 이탈리아의 사실주의에서 프랑스의 불꽃 양식(Flamboyance)까지 다양했고 공통적으로는 감동적인 효과를 극대화하고, 고도의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크 시대는 1600년경 로마에서 시작되었다. 이 당시 로마 교황청은 반종교개혁 이후 그들의 승리를 자랑하기 위한 엄청나게 사치스러운 성당이나 일생에 한번은 반드시 보아야할 건축물과 예술 작품을 통해 신도들을 끌어 모으고 그들의 시선을 압도하려는 목적으로 예술 활동을 적극 후원했다.
프랑스는 절대군주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며 절대권력을 누리고 있었고 방문자들이 왕의 위대함과 권력에 찬탄할수 있도록 꾸며졌다. 프랑스 화가들은 또한 푸생이 그리스 로마의 신화 속 신들이 있는 풍경화를 그린 것과 같이 비종교적인 주제를 그리기도 했다.
플랑드르와 같은 카톨릭 국가에서는 종교미술이 전성기를 맞았고, 반대로 영국과 네덜란드 같은 북부 유럽의 신교국에서는 종교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미술의 소재가 정물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등 일상 생활로 확대되었다. 미술품의 후원자들도 부유함을 과시하려는 거상부터 자신의 집을 장식하려는 부르주아까지 다양해졌다.
북유럽 바로크를 대표하는 렘브란트의 (야간 순찰대)부터 카톨릭 바로크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루벤스의 파노라마와 같은 감각적인 종교화에 이르기까지 바로크 시대는 드라마나 연극같이 극적이고 풍요로운 시기였다.
2. 이탈리아 바로크
최초로 바로크미술을 개최한 이들은 로마 미술가들이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미술 아카데미가 생겨나서 르네상스 시대에 발달한 회화 제작 기법을 화가들에게 가르치고 있었다. 따라서 화가들은 어떤 각도에서도 인체를 능숙하게 묘사할 수 있었고 아무리 복잡한 원근법이나 그리기 어려운 대상도 쉽게 그려낼 수 있었다. 그러나 르네상스에서 갈라져 나온 바로크 미술은 합리주의와 정적인 요소를 중시하던 르네상스와는 달리 감정적이고 역동적인 스타일을 강조했다. 그것은 마치 바로크 화가들이 르네상스 그림 속의 인물들을 끌어내어 격렬한 운동을 시키는 것과 같았다. 17세기 이탈리아 바로크를 대표하는 인물들은 화가 카라바조, 조각가 베르니니, 건축가 보로미니가 있다.
3. 플랑드르 바로크
카톨릭 지역이었던 플랑드르에는 루벤스(Rubens, Pieter Paul 1577~1640)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1600 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8년간 만토바의 궁정화가를 지내면서 고전 양식과 르네상스, 바로크를 이해했고 티치아노와 베로네제, 틴토레토의 작품들에 대하여 많은 연구를 하면서 빠르게 바로크 양식을 수용하였다.
그는 네덜란드식의 작은 그림보다는 바로크. 궁전에 걸맞은 대작에 더 관심이 많았었는데, 앤트워프에 있는 예수회 교회의 천장화를 39점이나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의 화려하고 풍부한 색채와 곡선, 역동적인 화면 구성은 동시대 프랑스의 푸생과 커다란 대조를 이룬다.
4. 네덜란드 바로크
네덜란드는 신교가 지배적인 독립된 민주국가였다. 따라서 종교화가 금지되어 있었고 성당, 왕실, 귀족 계급과 같은 미술의 주요 후원자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미술의 주제와 소유권이 민주화되었던 것이다.
미술가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미술 판매 시장을 작품을 거래했다. 모든 사람들이 값비싼 미술품으로 자신의 집을 치장하는데 열심이었다. 이러한 열성적인 미술품 수집열 덕분에 수많은 화가들과 높은 수준의 미술품이 쏟아져 나왔는데 화가들의 계층도 정물화, 해양화, 실내화, 동물화와 같이 각자의 특기로 세분화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의 바로크 예술은 1610~1670년 사이에 개화했다. 그 양식은 사실적이고 주제는 일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화가들은 투박하거나 반짝이는 각기 다른 질감의 표면에 빛이 흡수되거나 반사하는 작용을 표현했다. 대부분의 네덜란드 화가들은 보수적이어서 자신의 특기 분야를 되풀이해서 그려내는데 만족하였지만 할스, 렘브란트, 페르메어 같은 3명의 거장들은 능란한 기교를 넘어서 독창적인 경지에 들어선 화가들이다.
5. 영국 바로크
17세기 영국은 혁명의 세기로서 찰스 1세는 국왕이었음에도 반역죄로 처형당했고 크롬웰 (Cromwell) 이 교회 미술을 금지했으며 의회파들이 정권을 잡았던 시기였다. 17세기 영국 문학은 세익스피어, 밀턴에 의해 전성기를 맞았지만 미술은 훨씬 그에 미치지 못했다. 청교도 교회에서 종교 미술은 금지되어 있었고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은 영국인들 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미술은 거의 초상화에 국한되어 있었다. 과거 영국의 우수한 초상화가는 홀바인과 판 다이크의 예에서 보듯이 거의가 외국인들이었다. 그러나 17세기에는 최초로 영국 출신의 3명의 중요한 화가가배출되었는데 호가드, 게인스버러, 레이놀즈이다.
6. 스페인 바로크
벨라스케즈(Diego velizxquez, 1599-1600)이다. 왕실의 수석화가가되었고 이후 30년 동안을 궁에서 봉사했다. 벨라스케즈의 궁정 초상화는 시각적 사실주의의걸작이다. 그의 그림에는 윤곽선이 보이지 않으며 대신에 유동적인 화필로 사물의 형체를 이루어나가고 있고 물감의 얼룩으로 빛과 색채 표현을 묘사하여 인상주의의 선구자 로 알려져 있다.
벨라스케즈의 단순하고도 실제적인 표현은 다른 바로크 예술가들과 차별되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자연 속에서 구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았다. 골동품적인 화풍이나 우화적인 상징을 남발하는 바로크의 과장된 스타일에 압도당하지 않고 자신의 눈에 보이는 바 그대로의 세계를 묘사하는데 충실했다.
왕을 그리든, 궁전의 난장이 광대를 그리든 벨라스케즈는 모든 대상들에 존엄성을 부여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그는 중래의 딱딱하고 관습적인 궁전 초상화들 보다 인간적으로 보이게 했는데 모델들은 변잡한 장신구를 걸치지 않고 자연스런 포즈를 취하고 있다. 능란한 기교를 구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허식적인 이상화 대신 사실주의적 표현법을 선택했다. 벨라스케즈는 사실주의의 대가로 칭송받고 있지만, 이와 같은 효과는 자유롭고 거친 화필로 이루어내고 있다. 이것은 가까이서 보면 얼룩진 물감 범벽으로 보이지만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기적처럼 형체가 나타난다.
7. 프랑스 바로크
17세기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였으며 루이 14세(Rouis XIV)는 자신의 군주권과 왕궁의 영광을 과시하는데 놀라운 열성을 발휘했다. 로마의 유적을 모델로 베르사이유 궁을 건축한 이후 프랑스는 로마를 대신해서 유럽 미술의 중심으로 떠올랐으며 이런 상황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계속되었다. 아카데믹한화가 푸생, 이탈리아 시골의 전원적인 풍경을 표현한 클로드 로랭이 있다. 로랭은 고전 유물보다 자연 그자체와 새벽녘, 석양의 고요한 빛에서 영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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