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 고딕미술
1. 개관
고트족(Goths)은 4~5세기 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 서로마 제국을 붕괴시켰던 게르만족인 동고트족(0strogoths)과 서고트족(Visigoths)를 지칭한다. 이들이 고전의 문화를 파괴했다고 보았기 때문에 초기 르네상스와 이탈리아의 예술이 아닌 것들에 대한 명칭을 찾던 16세기의 이탈리아 역사가와 비평가들이 경멸의 뜻으로 Gothic이라는 수식어를 만들어 내었다.
고딕의 전개는 건축에서
①가운데가 뾰족한 아치 형태(첨두형 아치)가 나타나는 1150년경, 이탈리아(1400년경)와 ②알프스 북부 지방(1500년경)에 고전적 질서가 들어오는 시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실제로 1150~1400 또는 1500년의 이 시기는 미술에서 형상이 크게 대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1150~1250년간은 비잔틴 예술의 형식과 상징으로부터 자연주의와 사실주의, 인간적인 것에 대한 관심으로 바뀌는 과도기였다. 그러나 1400년 이후부터는 보다 학구적이고 복고 취향적이 되어 로마네스크도, 비잔틴도, 르네 상스도 아닌 시대가 도래하여 이 시기의 양식에 대한 이해를 어렵게 한다.
2. 특징
(1) 건축 :
고딕 양식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분야는 건축이다. 건축에서 고딕 양식으로의 이행은 12세기에 이르러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는데, 북부 프랑스의 중심부인 일드프랑스(Ile de France)에서 시작된다. 1140~ 44년 쉬제(Suger. Abbot) 수도원장이 파리(Paris) 근교에, 세운 <생드니 St. Deris 수도원>을 고딕 건축 양식의 효시로 본다. 이후 이 양식은 유럽전역에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다.
고딕 건축의 특징은 첨두형 아치(pointed arches)와 공중 부벽(flying buttress) , 갈빗대 모양으로 휘어진 리브(rib)가 서로 교차하며 이루어 내는 궁륭 천장 등에 있다. 이 구조는 이때까지 한번도 실현해 보지 못한 높이를 가능하게 하였고, 단 순히 역학적 구조의 기능만 있었던 두꺼운 벽은 창문으로 대치되어 스테인드글라스라는 새로운 장식 미술의 세계를 열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내의 채광에도 큰 역할을 하게 하였다. 생샤펠(St. Chapelle, 1243~48/프)은 이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의 대표적인 성당으로 꼽힌다.
한편 고딕 건축이 실현한 이 수직성은 당시 사람들의 신앙심과 결부된 깊은 정신성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건축에 참여했던 기술자들이나 미술가, 후원자들은 오히려 종교와 관계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12 세기에는 이미 보편적인 일이 되었는데, 이전에는 각 종파의 수도사들이 담당했던 일들이 13~14세기에는 점점 세속화되어 오노레(Honore), 조토(Giotto) 등과 같은 일반인 신분의 전문가들이 담당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딕 예술은 꼭 '신의 위대한 영광을 위해 바쳐진 것'만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길드(guild; 조합)를 조직하여 상업화와 대량 생산, 즉 사회 경제의 변화에 적응했던 당시 장인과 기술자들의 생산품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영역에는 충실하였지만 예술가적 창의성이나 상상력보다는 기능적 숙련성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체의 조화가 결여되는 경우가 많았다. 고딕 후기의 플랑브와양(flamboyant) 양식은 이러한 변화를 보여 주는 한 예이다.
대표적인 고딕 성당은 • 빈(Wien, 1304~1446/오) • 스트라스부르그(Strasburg, 1277~1439/프) • 랑(Laon, 1190~95/프) • 글로스터 (Gloucester, 14C~/영) • 시에나(Siena, 13C 초~1382/이) •성프란체스코 (St. Francesco, 1228~53/이) • 제로나(Gerona, 1291~/에) 등 많이 있다.
(2)조각 :
수직적인 고딕 건축이 보여 주주는 깊은 신앙심과 정신성과는 반대로 미술가들은 인간과 자연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신학은자비로운 신앙을 지니도록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었기 때문에 성모상은 성당의 중요한 위치에 세워지게 되었다. 또한 대학읜 발달은 진리에 대한 탐구욕과 고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래서 거의 모두 성당의 장식물로 보이는 조각물들은 양식에 있어서도 다양성을 보인다. 1200-10년 샤르트로 성당의 북쪽 현관에 조각한 <선지자> 들의 형상은 길게 드리워진 옷과 함께 수직적인 고딕 건축 양식에 부합되도록 변형되어 있지만, 랭스 성당의 북쪽 수랑 정면에 조각(1220년) 되어 있는 <사도상>과 서쪽 현관의 <성모와 마르타 Varthia상>은 그리스 고전기의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양식의 출현에 대하여는 명료한 답을 내리고 있지 못하지만 판베르덩(Van Verdun, Nicolas 1130경~1205/네)의 모산(Mosan) 작업장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새로운 양식의 시작이 아니라 기존 양식의 끝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프랑스의 양식을 따랐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건축이서나 조각에서나 프랑스의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현저하게 지역성을 보인다. 이탈리아에서는 성당의 입구에 부조 장식이나 조각상 설치를 기피하고 문이나 제단을 장식하는 것을 선호하였다.
그래서 제단과 설교단의 조각물들이 많이 제작되었는데, 아르노 강 어귀에 위치한 피사에는 피사노 부자(부 : Pisano, Nicola 1220/1225~1284경, 자 :Pisano, Giovanni 1265~1314)의 제단 작품들이 다수 남아 있다. N.피사노의 피사 성당 제단 조각은 고전 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당시로서는 새로운 공간감 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이후 르네상스기의 작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2명의 후계자를 길렀는데, 캄비오(Cambio, Amolfo di)와 아들 G.피사노 이다. 건축가이기도 했던 G. 피사노는 아버지보다 훨씬 역동적인 표현을 남겼으며, 건축물에 종속된 조각의 위상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기도하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플랑드르(현 벨기에, 네덜란드)가 조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데, 이는 플랑드르 회화의 옷주름 처리가 조각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슬루터르(Sluter, Claus 1340?~1406/네)의 조각은 그의 조카 버브 (Werve)가 15세기로 이식시켰다. 한편 이 당시에는 제단의 조각 장식이 크게 유행하여 16세기까지 지속되었는데, 파허(Pacher, Michel 1435?~98/독)의 작품 <성볼프강St. Wolfgang am Ambersee>의 제단은 복잡, 섬세하기로 유명하다. 이는 이후 각 나라에 무덤의 기념비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3) 회화 :
고딕 시대 회화의 전개는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에서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면서 이 탈리아에는 비잔틴 양식이 1세기 동안 크게 유행하였다.
당시 두초(Duccio di Buoninsegna 1255? ~ 1318?)가 활동했던 시에나는 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하여 시에나파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14세기에 고딕 양식이 들어오면서 치마부에(Cimabue 1240~1302)와 두초의 회화는 이 두 양식이 혼합된 엄격한 구성과 원근법의 시도를 보이게 된다.
치마부에의 제자였던 조토(Giotto di Bondone 1276~1337경)는 원근법에 의한 깊은 공간감과 인체에 중량감을 줌으로써 회화에 시각적 실재감을 나타낼 수 있었다. 회화에 있어서 이러한 획기적인 그의 업적은 파두아(Padua)의 <아레나 Arena 성당 벽화/프레스코>에서 확연하게 증명된다. 그를 서양 미술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회화에서 주제와 양식의 문제를 방법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르네상스 회화 탄생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4세기 중반 유럽을 휩쓸었던 페스트의 발병으로 시에나의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들 때 화가들도 많이 죽었다. 이러한 재난으로 성모상보다는 최후의 심판에 관한 상징적 표현이 증가, 회화는 다시 전통적인 양식으로 회귀하면서 일시적으로 정체 되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북부에 국제 고딕 양식이 계속되고 있을 즈음, 자연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미술가들이 알프스 산자락의 북쪽과 남쪽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템페라와 유채를 사용함으로써 대상을 천천히 객관적으로 묘사 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심은 플랑드르의 부르고뉴 (Bourgogne) 공국(현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이었다. 이곳 사실주의의 화가들 은 필립(Philip) 대공이 후원하는 샹몰(Chartreuse de Champmol) 수도원에서 활 동하고 있었다.
1420년 정치적인 중심지를 디종(Dijon)에서 브뤼셀(Brussel)로 옮기면서 이곳은 유럽에서 후원자들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가 되었으며, 플랑드르 양식이 탄생 하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캉팽(Campin, Robert 1375?~1444?/플랑드르)
의 새로운 옷주름 처리 방법으로부터 시작되는 플랑드르 양식은 프랑스 양식과 국제 고딕 양식을 수용하고 여기에 그림자를 통한 빛의 효과를 나타내어 실재감을 크게 높였다. 빛의 효과는 플랑드르 회화가 이룩한 가장 큰 업적으로서 놀랄 만큼 예리하게 대상을 묘사해 낼 수 있는 방법이었다. 동시대의 화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던 궁정화가 판에이크(Van Eyck, Jan 1395~1441)는 이 음영법과 원근법을 구사하여 회화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광대한 공간감과 깊이감. 그리고 실재감을 나타내었다.
(4) 스테인드글라스(stained glass; 유리 그림) :
스테인드글라스가 최초로 나타난 시기는 비잔틴 시대였지만 로마네스크 후기부터 고딕 시대에 걸쳐 많이 사용되었다. 리브(rib)의 출현으로 얇은 벽체로도 높이 지을 수 있게 된 건축술의 발달은 창문의 크기를 확대시켰고 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실내 채광의 기능을 넘어서게 되었다.
고딕 시대의 회화적 표현을 대표하는 이 유리 그림은 당시 열악한 유리 생산 기술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 조각 유리들을 하나씩 맞추어 가며 납으로 붙여 형태를 만들어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세밀한 부분은 그려넣을 수 밖에 없었다. 부르주(Bourges) 성당의 창에 장식된 4m가 넘는 거대한 <선지자 들〉(하박국, 미가, 요나, 오바댜 등 1220년경)은 샤르트르 성당의 장미창과 함께 13세기 고딕 시대의 대표적인 스테인드글라스로 꼽힌다.
유리 그림이 가장 활발하게 제작된 시기는 1200~50년경이었다. 그러나 이후 건축의 부진으로 수요도 줄어들면서 한동안 소홀했던 필사본의 세밀화 제작이 다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자료 출처 : 미술실에서 미술관까지(미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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