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 로마네스크(Romanesque)
1. 의미
로마네스크미술을 아르 로망(1'art roman/프), 아르테 로마니코 (arte romanico/이), 로마니쉐 쿤스트(romanische Kumst/독)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대체로 'Rome 미술'로부터 파생된 로마적인 미술을 뜻한다. 그런데 영국에서 종종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노르만 (Norman; 북방인이라는 뜻)은 꼭 영국에서 이루어진 로마네스크 양식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이 양식은 로마 양식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지만 초기에는 각 지방의 문화가 하나씩 혼합되면서 퍼지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노르웨이의 바이킹(Viking), 초기 그리스트교 미술, 비잔틴, 카롤링거, 오토, 심지어는 이슬람 양식들까지 뒤섞이면서 이 시기의 일반적인 양식이 된 것이다.
2. 배경
이 양식은 11세기에 나타나 12세기에 번성, 고딕(Gothic)으로 이어졌는데, 어 느 한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예술 활동도 활발했던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 에스파냐 등지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당시 서유럽은 거의 쇠잔해 있었는데, 이탈리아 대부분을 지배했던 독일 (오토)이 처음 부흥과 안정을 얻기 시작하면서 부르고뉴(Bourgogne/프, Burgundy/영)의 클뤼니 수도원(Cluny abbey)에서 시작된 개혁 운동으로 수도원 들이 회생하고 교황권이 회복, 몰락해가던 교회도 다시 소생하게 되면서 클뤼니 대수도원은 전 서유럽을 통하여 모든 수도원의 중심이 되었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은 서로 조화를 이루기 바랐으나 다른 나라에서 는 황제와 성직자의 이원적 지배 구조를 수용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다툼으로 국력들이 쇠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교황이 승리함으로써 스칸디나 비아 반도를 포함하여 폴란드, 헝가리까지 그의 영향력이 확대되어 로마의 영향력이 미쳤던 곳에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질서가 확립되어 로마네스크 미술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그 중심부였던 베네딕트(Benedict)파의 클뤼니 대수도원의 역할은 이후 생 베르나르(St. Bernard) 대수도원이 수행하면서 12세기 미술과 고딕 건축의 출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수도원은 신앙뿐만 아니라 교육과 문학, 예술 활동의 중심이 되었는데, 12세기가 되면서 이러한 지적, 예술적 활동의 주도권은 대학(university)으로 옮겨지게 되어 12세기 문예 부흥을 맞게 되었다.
3. 특징
(1) 건축 :
로마네스크는 원래 건축에서 사용되었던 말이었다.
11세기에는 건축 기술과 교회 설계에서 커다란 발전이 있었는데, 돌을 사용했던 10세기의 건축으로부터 벽돌 사용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벽돌 건축은 아랍 건축가들이 북부 에스파냐의 그리스트교 지역에 살기 시작하면서 사하군(Sahagun)에서 시작되더니 곧 남쪽의 톨레도(Toledo)까지 널리 퍼졌다. 많은 건축물이 이 양식을 모방, 십자군 요새나 순례자를 보호하는 기사단의 건물, 병원 등도 로마네스 크 양식으로 지었으며. 12세기가 끝날 때까지 로마네스크는 계속되었다.
당시의 교회는 촛불을 많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목재 가구와 바실리카의 통나무 천장. 커튼 등이 언제나 화재의 위험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선 지봉을 석재로 바꾸는 일이 급선무였는데, 지중해 연안 지역의 로마 양식이 그 모델이 되 었다. 아지 모양의 둥근 천장(궁형)은 공간이 좁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애프스와 측면 복도(aislc)부터 도입, 점차 본당까지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것을 1차 로마네스크라고 하는데, 9세기 말 롬바르디아(Lombardia)에 세워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교회는 11세기에 세워지게 되며. 이 기술은 지중해를 따라 서쪽으로는 에스파냐의 카탈루냐(Cataluina), 북부 이탈리아의 달마치아 (Dalmalia)와 스위스. 그리고 론(Rhon) 강과 라인 강의 하류까지 전파되었다.
이 양식의 외형적 특징은 외부에 많은 아치가 늘어선 복도가 있고 기둥은 노출 되어 있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2개의 터널 같은 천장이 오른쪽 모퉁이에 서 서로 엇갈리도록 되어 있는 점이다.
이 구조는 창문 사이의 무거운 벽의 무게가 벽을 밖으로 밀지 않고 네 구석이 고루 받게 된다는 이점이 있다. 그 다음 단계는 2개의 아치를 서로 엇갈리게 하는 리브(rib)의 발명이었다. 이 기술로 이미 건축적 기능을 상실했던 아치들 사이 의 석재 무게를 줄여 지붕을 궁륭(vault)으로 한층 넓고 크게 덮을 수 있게 되었 다. 이 리브 구조는 혁명적인 중세 건축 기술로서 고딕 양식으로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서유럽 건축의 또 다른 특징은 두 개의 탑을 갖고 있는 것인데, 이 특징은 특히 독일과 프랑스, 영국 등지의 중요한 교회에서 오랜 전통이 되어 고딕시대까지 진화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내부의 양식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따로 독자적인 구조로 분리하였다.
한편 초기 그리스트교 시대부터 계속되어 온 성스러운 땅으로의 순레는 순례자들이 둘러볼 수 있는 많은 방들과 회랑이 있는 양식을 낳게 하였다.
이러한 대표적 로마네스크 양식은 1088년에 시작된 <글퀴니 수도원>의 재건축 에서 나타났는데, 이 대수도원은 로마에 <산피에트로 성당>이 재건축되는 16세기까지 가장 큰성당 건축물이었으며, 많은 방을 만들기 위하여 좌우에 수랑과 전면 양 옆에 탑을 세웠고 입구에는 큰 홀을 두었다(일부만 전함). 이후 도처에서 이 양식을 따르게 되었지만 국력이 강했던 나라에서만 지속되어 노르만 수도사들에 의해 영국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2) 회화 :
창이 작고 벽이 넓은 로마네스크 교회의 실내는 거의 모두 프레스코화로 장식하였다(그런데 마름돌을 아름답게 다듬은 것으로 보아서 아무 것도 칠해져 있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었던 19세기의 많은 사람들은 프레스코화의 바탕인 회를 제거해 버린 일이 있었다.) 왜냐 하면 9세기 카톨링거 왕조 이후 서유럽에서는 값비싸고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모자이크를 선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보트 데시데리우스(Abbot Desiderius)는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인기술자들을 불러와 몬테 카시노(Monte Cassino) 수도원에 모자이크를 제작했었다. 이것은 남아 있지 않지만 로마의 산클레멘트(St. Clement, 1128)와 트라스 테베레(Trastevere)의 산타마리아(St, Maria, 1140) 성당으로 이식되었고. 로마 밖으로는 시칠리아(Sicilia)와 베네치아(Venezia)를 중심으로 모자이크가 두드 러졌는데 이것도 비잔틴을 모델로 하는 것이었다.
특히 시칠리아의 노르만 왕은 콘스탄티노플의 영광에 대한 질투심으로 자 신의 권력이 미치는 지역(동방과의 무역 지대인 Cefalu, Palermo, Monreale, Venezia 등)에 비잔탄적인 모자이크 장식의 후원자가 되었다. 그래서 베네치아 에 있는 산마르코(St. Marco) 성당이나 토르셀로(Torcello)와 무라노(Murano)섬들에 있는 것들은 11세기에서 14세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들인데, 그리스의 기술과 양식이 로마네스크의 형식과 혼합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① 프레스코 : 프레스코는 젖은 석회 위에 채색하는 기법으로 이 시기에 전반적으로 유행하였다. 이 기법은 종종 마른 회벽에 채색하는 세코(secco) 화법이나 템페라와 혼용되기도 하였다. 중앙의 애프스에는 그리스도를, 주변의 공 간에는 성모 마리아나 성당의 후원자를, 반대편에는 구약과 신약의 내용. 서쪽 벽에는 최후의 심판 등을 그려 넣는 몇 가지의 표현 원칙이 있었다. 초기의 프레스코화는 모자이크의 양식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카푸아(Capua) 근교의 산안젤로(St. Angelo) 성당의 벽화는 몬테 카시노를 가장 많이 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로마 후기의 환영주의(illusionism)와 연결되어 있는 초기 그리스트교 미술과도 연관성을 보이고 있다. 이렇게 남부 이탈리아는 비잔턴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 그외의 지역에서는 비잔틴의 기법과 양식을 다양하게 전개시켜 나갔다. 콘스탄티노플과 그리스 등지를 순례했던 화가들은 자연주의적 요소를 발견, 역동적인 선과 하이라이트를 구사하여 입체감을 나타내었고 옷 주름은 인체의 구조를 나타내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클뤼니 수도원에 속하는 조그만 베르제(Berze 성당의 벽화에서 볼수 있는 이러한 선적인 표현이 산클레멘트 성당에서는 양식적으로 발전되면서 평면적으로 나타나게 되어, 로마네스크 회화 양식의 특징은 이같은 평면적 양식이라고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서부의 생샤뱅(St. Savin) 성당과 같이 다양한 양식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도 있다.
② 필사본(삽화) : 이 당시의 책들이 전부 도판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지만 로마네스크 회화는 책의 도판에서 가장 큰 업적을 이룩하였다. 오늘날 책의 삽화를 그리는 일은 미술가들이 하지만 당시에는 수도사들이 했었다. 이들은 많은 책을 복사하면서 그림도 그렸는데, 그러나 이 성스러운 작업을 속세의 화 가들에게 맡기는 일도 많았었다. 본래 카롤링거 시대의 <알퀸 시편Alcuin Psalter)은 이후 3번(1000, 1150, 1200년)이나 복사되었는데, 최초의 것이 가장 원형을 따르고 있어 단순히 그대로 복사했던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각각 다르게 이루어졌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러한 변화는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의 변화를 잘 보여 준다. 양식적인 면에서 가장 지방색을 강하게 보였던 곳은 벨기에의 모산(Mosan), 독일의 레겐부르 크(Regensburg), 잘츠부르크(Salzburg), 쾰른(K6lm) 등지로서 특히 모산 지 역은 이 시대에 가장 유명한 곳이었다.
삽화가 가장 활발하게 그려진 곳은 영국이었다. 노르만이 정복한 후 영국 교회를 개편, 노르만 수도사들이 유입되면서 노르만 회화가 소개되었다. 그 중심은 캔터베리(Canterbury)였는데, 1120년 <세인트 올번스St. Albans 시편)에서부터 많은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140년의 비잔틴 양식의 영향 을 받아 제작된 <캔터베리 성경>은 12세기 영국 회화에 영향을 준 대표적인 것으로 화려한 색채와 금니의 사용, 착 달라붙는 옷, 경직된 인물 형태 등이 특징이다.
그러나 윈체스터(Winchester)에서는 풍요롭고 역동적인 양식이 나타났는데, 1170~80년 이후부터 점차 부드러운 형태가 나타나 영국과 유럽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양식은 궁극적으로 비잔틴과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발전된 로마네스크 양식은 초기 고딕(proto Gothic) 양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③스테인드글라스(sainedl glas) : 이 시기에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이 나타나기는 했으나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고 12세기 후기에 반달하기 시작. 13세기 고딕 시대에 이르러 프레스코화를 대신하게 되었다. 주로 프랑스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150년경 모산 지방의 예술가들에 의해 이루어진 마른(Marne)의 샬롱(Chailons) 성당의 것과 같이 꼭 프랑스 사람들에 의해서만 제작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의 발달을 가져다 준 사람은 생드니(St. Deris)의 아보 쉬제르(Abbot Suger)였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파괴되었지만 그가 보여준 예수 하강의 구성법은 샤르트로 (Chartre)나 요크 민스터(York Minster) 등 많은 곳에서 수용되었고, 삽화 양식으로도 사용되었다.
(3)조각 :
10세기 부정되었던 조각 예술의 부할은 11세기의 마지막 20년 동안 다시 시작되었다. 건축물의 부속으로 여겼던 오토 왕조의 등글동글한 형상으로부터 시작된 조각 활동은 툴루즈(Toulouse) 지방이 중심이 되었는데, 이곳은 순례지로 통하는 경로였다.
이 당시의 조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생세르냉(St. Serin) 성당으로서 당대 의 조각가 길두이누스(Gilduinus)의 작품들인 대리석 제단, 7점의 벽면 부조 등 이 있다. 그의 부조는 다양한 양식을 보이는데, 그중 하나는 자연주의적 양식 을 보이고 있어 로마 조각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입구(=미에제비유 miegeville)의 아치와 기둥은 다른 순례지의 성당에도 적용되어 순례지 조각의 맥을 이루게 되었다. 이렇게 툴루즈에서 시작된 조각은 건축의 외부 장식으로 점점 더 많이 필요로 하게 되어 건축가와 조각가의 협동은 매우 긴요한 일이 되었다.
한편 부르고뉴나 랑그도크(Languedoc) 역시 툴루즈와 같은 조각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가장 혁신적인 변화가 있었던 곳으로 11세기 후기의 클뤼니 성당에 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부르고뉴(Bourgogne) 최고의 조각가는 오팅(Autum)의 팀파눔을 조각한 기슬레베르투스(Gislebertus)와 베젤레이(Vezelay)에 있는 팀파눔(tympanum)을 조각한 사람(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음)이었는데, 커다란 팀파눔 때문에 출입문 가운데를 지지하는 기둥인 '트르모(trumeau)'를 사용하는 건축 양식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 기둥은 조각가들이 무엇인가를 조각할 수 있는 것이 될 수 있었다.
이와 비견되는 예는 1100~1125년대에 세워진 므와사크(Moissac) 수도원이 있다. 이곳의 팀파눔에 새겨진 계시록은 복잡하고 힘이 있으며 아름다워서 당시 조각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팀파눔이나 트뤼모 등 현관의 조각들이 아직은 전체적인 조화를 갖고 있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조화는 얼마 후 생드니 (St. Denis) 성당의 현관이 만들어지면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로마네스크 조각은 유럽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에스파냐의 실로스(Sil0s) 성당에서는 이슬람의 상아 조각에 그 근원을 두고 있는 열거식의 복잡한 구성법 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랍의 기술자들이 대거 고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로마 양식을 모델로 하여 사자나 코끼리 인물 등을 자연주의적으로 표현한 대리석 성좌(포4)가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산니콜라스 (St. Nicolas), 모데나(Modena), 페라라(Ferrara) 성당의 현관 기둥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후 샤르트르 성당의 좌우 수랑(IR) 에까지 연결되었다.
이 당시의 대표적인 조각가로는 모데나 성당의 장식을 맡았던 빌리제르모 (Wiligelmo)와 모데나, 베로나(Verona) 성당을 장식한 니콜로(Nicolo)가 있었는 데, 우아한 니콜로의 장식은 생드니의 초기 고딕 양식으로 나아가는데 큰 영향 을 주었다. 그리고 롬바르디아 조각파는 풍부한 주제와 다양한 표현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녀서 독일, 스칸디나비아, 헝가리, 폴란드. 심지어는 러시아까지 이를 따랐다.그러나 토스카나 지방의 피사(Pisa)에서는 프로방스(Provence)파와 관계가 있었던 굴리엘모(Guglidlimo/이탈리아)가 로마 전축과 조각 양식을 연상시키는 성당을 축조하였다. 프로방스의 작품들은 기술자들이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여러 지방의 양식들을 섞어 놓았기 때문에 이탈리아, 부르고뉴, 프랑스의 양식들이 혼재, 이 양식은 에스파냐의 카탈루냐 등지에서도 발견된다.
그리고 영국은 롬바르디아와 서부 프랑스의 영향을 폭넓게 받았지만 윈체스터(Winchester)파 양식과 바이킹의 동물 조각 양식이 가장 많이 수용되었다. 그래서 기념비적이라기 보다는 조그마한 장식품 조각이 주로 이루어졌으며, 독일에서는 오토 시대의 양식을 따라 금속 공예나 상아 조각의 양식과 가깝다.
(4) 기타 : 그 밖에 이 시대의 미술품으로는 노르만의 영국 정복을 내용으로 하는 바이외(Bayeux) 타피스트리를 700m로 수놓아 제작한 것이 있으며, <글 루스터Gloucester 성당의 금제 초대>, 그리스도의 세례가 부조되어 있는 르니에 데 위(Renier de Huy /벨)의 <청동 성수반> 등이 있다.
-출처: 미술실에서 미술관까지(미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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