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서양미술

[미술사] 19세기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미술 사조 알아보기

츄츄네 2024. 1. 12.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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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19세기 배경


2. 신고전주의 (프랑스)

 (1) 배경
 (2) 특징
 (3) 작가    ①다비드  ②앵그르

3. 낭만주의(프랑스)
 (1) 배경 
 (2) 특징 
 (3) 작가    ① 제리코   ② 들라크루아

 

1. 19세기 배경

(1) 시대적 배경

서구 역사에서 19세기는 격변의 시대로 기록된다. 교회는 그 세력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군주제도가 무너져 갔으며, 새로운 민주주의는 성장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다시 말해 전통이 그 권위를 잃었고 미래는 불확실했던 시기였다.

산업혁명과 도시화로 인해 도시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빈민들이 들끓게 되었다. 과학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제어할 수 없는 제국주의의 병폐는 이런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2) 미술적 배경

1800년경의 미술계 상황도 다양한 요소들이 과도하게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같이 한 양식이 몇 세기 동안 지속 되었던 시대는 가고, 한 사조와 그것에 맞대응하는 사조가 끊임없이 생겨났다. 그것은 곧 어떤 '주의(~ism)' 로 불리며 각각의 미술 사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세기를 휩쓸었던 '주의(~ism)' 들을 종합해 보면 신고전 주의, 낭만주의, 사실주의라는 세 개의 주요 사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세기말에 이르면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아르누보, 상징주의와 같이 어떤 유파가 휩쓸었다가 금방 다른 유파로 대체되는 양상을 보인다.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배경 로코코 미술에 대한 반발, 합리주의 미학,
폼페이 유적 발굴과 고대 연구로 인해 그리스 미술 이념 동경,
프랑스 혁명관련 애국적 교훈적 정치적 역사적 주제를 활용하며 윤리 규범 강조
이성 중심의 신고전주의에 반발,
중세풍의 로멘티시즘 취향
주제 ①그리스 로마신화, 역사,
   정치적 이념과 사건
②프랑스 혁명과 관련된도덕적 주제
전설, 이국적인것, 자연, 상상적 주제
기법 소묘, 선중심, 정확한 묘사,
    붓자국 없는 화면
평면적인 공간, 이성적 형식미 추구
색채와 분위기 중심, 애매 모호한분위기 위주의 색채 효과, 풍부한 감정적 색 빠른 붓질, 강한 명함대비
구도 균현잡힌 정면성 원리 확립 비대칭, 동적 구도, 사선 구도
분위기 고요, 이성적, 정적 동적, 감성적, 초현실적, 주관적
특성 미술의 역할  :
도덕성 고양, 정치적 대변, 교훈전달

질서, 엄숙함
미술의 원천 :
중세, 바로크 가치관, 직관, 개인의 감정 존중, 무한한 상상력 반영

주관적, 자발적, 비순응적


장엄한 고전양식의 부활
새로운 공간질서 마련
     ( 직선, 비례 활용)
자유로운 감성과 직관 표현
바로크 양식계승
대표 작가 다비드, 앵그르 제리코, 들라크루아

 

2. 신고전주의 (프랑스)

 

(1) 배경

회화, 조각, 건축, 가구에서 엄격한 고전 양식을 부활시켰던 신고전주의는 장식적인 로코코 양식에 대한 반동으로 나왔다. 18세기는 계몽주의의 세기로서 철학자들이 이성과 논리의 복음을 설교하던 시기였다. 이런 이성에 대한 믿음이 질서와 고귀함이라는 신고전주의의 미덕을 다시 불러냈다.

1738년 폼페이와 헤라큘레니움의 발굴로 인해 처음으로 고대 회화의 전모가 세상에 밝혀지면서 전 유럽은 고고학적인 열기로 들끓었다. '고전'을 향한 열기는 엘진 경이 그리스 파르테논에서 떼어온 대리석 부조들을 런던에 진열함으로써 더욱 불붙게 되었다.

 

(2) 특징

프랑스와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지도자들은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하는 교훈적인 신고전주의 운동을 강력히 지지했다. 이들은 감성에 호소하는 색채보다 이성에 호소하는 소묘와 선이 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은 엄격하고 분명하게 소묘된 인물들로서 그들은 로마의 부조 조각처럼 원근의 느낌이 거의 없이 회화공간의 전반부에 배치되어 있다. 붓자국은 거의 보이지 않아 화면은 매끈하며 구성도 단순하여 로코코의 복잡한 사선 구성을 피하고 있다. 배경에는 아치나 원주 같은 로마적 요소를 가미하고 있고 불규칙한 곡선 대신 직선과 비례를 중시하고 있다. 이 사조는 한 세기 전 푸생의 고전주의와는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데 푸생의 고전주의는 보다 자연스럽고 순수한 것이었다.


(3) 작가 


[①다비드: 복고풍의 회화]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에서 적을 무찌르지 못하면 죽음을 택하겠다고 맹세하는 세 명의 형제들은 방탕함 대신에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새로운 사회 분위기를 잘 반영하고 있다. 프랑스혁명으로 방탕한 귀족 계급이 전멸했듯이 이 회화는 새로운 금욕주의적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 다비드는 신세대와 구세대 간의 차이점을 딱딱하고 직선적인 남성의 윤곽선과 부드럽고 곡선적인 여성의 윤곽선 대조를 통해 확연히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구성까지도 견고함을 강조하고 있다. 다비드는 각 인물들을 조각상 같이 배열하여 로마식 아치가 있는 평면적인 배경 위에 돌출되어 보이도록 묘사하고 있다. 다비드는 인체의 표현에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인형에 로마식 의상과 헬멧을 씌워 본 후 그것을 스케치했다.

 

다비드 <마라의 죽음>  /  미켈란젤로 <피에타>


 혁명의 지도자 마라를 그린 《마라의 죽음》은 걸작이라 말할 수 있다. 다비드의 친구였던 마라는 급진주의 측의 대표였는데 욕실에서 집무를 보다가 반혁명 사람에게 살해 당했다.(마라는 피부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항상 약을 푼 목욕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야 했는데, 목욕통 위에 나무판자를 얹어 책상 대신 사용하여 집무를 보곤 하였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다비드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장면을 기록했다. 후에 대중들에게 성스러운 유물로써 숭배받게 되는 나무 상자와 피묻은 수건과 칼을 다비드는 그림 속에서 강조하고 있다. 다비드는 마라를 성자와 같이 묘사하였는데 그의 포즈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서의 예수와 흡사하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로베스 피에르가 실각하고 사형 당한 후 다비드는 감옥에 가게 된다. 그러나 그는 변화한 정치 상황에 적응하여 나폴레옹의 수석화가가 되었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같은 그림을 보면 혁명기의 단순한 구도 대신 황제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과장되고 화려한 양식으로 변화시켰다. 색채는 더욱 화려해졌으나 여전히 매끈한 화면을 자랑하고 있다. 그는 제자들에게 "붓자국이 보이게 그려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했으며, 그의 회화는 세밀하고 부드러우며 에나멜 같은 광택이 났다. 19세기 전반 다비드의 예술은 프랑스 미술계, 나아가 전 유럽 미술계가 추구해야 할 공식 모델로서 제시되었다.

 


[②앵그르 : 기교의 화가 ]

 

  앵그르는 스승 다비드 보다도 고전에 더 충실했다. 그의 초기 작품을 보면 그리스 도기화를 본받아 평면적이고 선을 강조한 소묘를 하고 있어 비평가들이 '원시파 (primitive)' 혹은 '고딕파(Gothic)'로 분류하고 있다. 앵그르는  "소묘야말로 진짜 미술이다" 라며 전통적인 회화 제작 기법을 옹호했다.  또한 회화적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강한 난색을 사용하는 것을 반전통적이라는 이유로 반대 했다. ( 당시 들라크루아와 제리코는 회화의 기본 요소로서 감성과 색채를 중시하며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대 오달리스크>


 앵그르의 여성 누드화는 그리스와 르네상스의 이상적인 미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대(大) 오달리스크》의 나른한 포즈는 르네상스적이라기 보다는 마니에리즘에 가깝다. 그는 주제를 택할 때도 아카데미적인 것보다 할렘의 후궁 같은 이국적이고 에로틱한 주제를 선택했다. 비평가들은 지나치게 머리가 작고 비정상적으로 등이 긴 이 인물을 비판했다. 하지만 앵그르는 그녀의 관능적인 우아함을 강조하기 위해 허리를 늘린 것이다.

 

사실 앵그르는 여성 누드의 대가였다. 작품 활동 기간 내내 앵그르는 목욕하는 여인들을 즐겨 그렸는데 다비드의 누드 보다 더 부드러운 스타일로 마치 도자기 같은 살결의 아름다움을 잘 묘사하였다.

 


3. 낭만주의(프랑스)

 

(1) 배경 

1800~50년 사이에 이성을 중시했던 신고전주의에 반발하고 일어났다. 

낭만주의를 일컫는 로맨티시즘이란 용어는 로망스라는 중세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는 중세풍의 흑마술과 신비주의적 요소가 뒤섞인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 인기를 끌었으며(『프랑켄슈타인』같은 소설이 이 당시에 쓰인 것) 이러한 중세풍의 취향은 런던 국회의사당 건물의 탑과 망루에서 엿볼 수 있다. 실내장식에도 중세풍이 유행했다. 

 

(2) 특징 

낭만주의는 감수성을 특히 중요시 했다. 작가와 화가 모두 이성적인 객관주의보다 감성과 직관에 의존했다. 독일의 낭만주의 풍경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Capar David Fredrich)는 "예술가는 자신의 앞에 보이는 것뿐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까지도 그릴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낭만주의자들은 자신의 정열이 이끄는 대로 극한까지 추구해 나가며 강렬한 삶을 선택했다. 

 낭만주의의 또 다른 특징은 자연에 대한 숭배열이다. 터너와 컨스더블 같은 화가는 풍경에 영웅적인 요소를 가미함으로써 풍경화의 위상을 높였다. 인간과 자연은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통해 서로 감응할 수 있으며 인간 내부에 숨겨진 신성함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낭만주의자들은 직관에 의지하여 그들의 신조를 지킬 수 있었다.

 

(3) 작가 

 

[① 제리코 ]

<메두사호의 뗏목>

 테오도르 제리코(Theodore Gencault, 1791~1824)는  작품 《메두사 호의 뗏목》으로 낭만주의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당대에 정치적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배의 조난 사고를 약 7m x5m되는 거대한 캔버스에 묘사한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세네갈로 프랑스인들을 나르던 국영 이민선 메두사호. 선장은 실력도 없이 인맥으로 정부에 의해 선임되었고 아프리카 서부 해안에서 조난당했다. 선장과 선원들은 구호선으로 도피한 후 임시로 만든 뗏목에 149명의 승객들을 싣고서 밧줄로 끌고 가기로 했다. 그러나 선원들은 뗏목과 연결된 밧줄을 끊고 도망쳤으며 승객들은 적도의 태양 아래서 12일 동안이나 물도 식량도 없이 표류하며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결국 구조선이 이들을 발견할 때 생존자는 오직 15명이었다. 제리코는 기자처럼 이 사건을 취재하면서 생존자를 만나 기아로 인해 서로를 잡아먹기에 이르렀던 무시무시한 체험담들을 직접 들었다. 그는 시체 공시소에 가서 부패한 시체를 관찰하고 보호수용소에서 미치광이들의 얼굴과 길로틴에서 처형당한 죄수들의 머리를 직접 스케치하는 등 이 사건을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자신의 화실에 모형 뗏목을 만들어 놓고 마치 배우같이 당시의 상황을 직접 체험해 보고자 폭풍우 속에서 이 뗏목을 몰아보기도 했다. 이러한 특이한 작업 과정이 그림의 세부묘사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서사시적인 드라마에 활기를 불이넣은 것은 제리코의 낭만적인 감수성이었다. 나체인 승객들의 긴장되고 비틀린 육체는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격렬하게 투쟁하였는지 보여주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내내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 그림의 주제이다. 이 무시무시한 주제의 생생한 묘사와 정부의 무능력을 비난하는 정치적 의미 때문에 이 작품은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낭만주의의 정열이 처음으로 과거를 이상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대의 진실을 표착하는 데에 쓰였던 것이다. 이 그림의 명성은 관학적인 아카데미의 억압을 깨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 순간부터 프랑스 미술은 지성보다 감성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던 것이다.

[② 들라크루아 : 정열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iene Delacroix, 1799~1863)가 낭만주의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우울하고 고독한 기질을 가졌으나, 열정적이었다. 들라크루아는 예술가란 그의 친구 쇼팽같이 천재의 불꽃을 태우며 창조의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자신의 글 속에 "진정한 인간이란 야만인과 같다"라고 쓰고 있다. 시인 보들레르의 말처럼 들라크루아는 '정열적으로 정열을 사랑한' 화가였다. 들라크루아는 사물의 외관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보다는 그 정수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또한 화가란 전통을 거부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릴 권리가 있다는 사고를 정착시켰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림 앞의 시체와 그림 속 인물들이 그리는 그림의 중앙에서 우측으로 약간 치우친 역삼각형 모양 등, 그림의 전반적인 구도가 테오도르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과 매우 흡사하다. 깃발을 들고 있는 여인은 제목대로 로마 신화의 자유의 여신 리베르타스라고 볼 수도 있고, 프랑스를 상징하는 의인화 캐릭터인 마리안(느)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자유의 여신 왼편에 소총을 든 신사는 화가 본인의 모습을 본땄다. 그림 속 프랑스 국기인 삼색기를 들고 있는 여성 옆의 아이는 훗날 프랑스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가 레 미제라블을 집필할 때 가브로슈의 모티브가 된다.

 

 

<사르디나팔의 죽음>


《사르디나팔의 죽음》은 폭력적인 장면에 대한 들라크루아의 관심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바이런의 시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인데 앗시리아 왕 사르디나팔은 전쟁에서 패배하자 종복들에게 자신이 자살하기 전 모든 소유물들을 파괴할 것을 명했다. 들라크루아는 왕의 후궁과 말들이 학살당하는 충격적인 장면을 그렸다. 불꽃같이 붉은 배경 위에 몸부림 치는 육체들이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다. 강렬한 색조, 생생한 명암의 대조, 활달한 화필로 그려진 격렬하게 움직이는 듯한 형태는 바로 낭만주의를 선언하는 것이었다.

 

들라크루아는 회화란 선으로 그린 위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라는 고전적인 개념을 바꾼 사람이다. 그는 번지듯 색채를 인접시켜 형태를 완성하는 채색방법을 사용하였고, 이러한 방법은 반 고흐, 드가, 세잔, 쇠라에게로 이어진다. 

[출처 : 클릭,서양미술사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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